헌법의 순간, 헌법 결정의 순간
<헌법의 순간>(박혁 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부제는 ‘대한민국을 설계한 20일의 역사’입니다. 1948년 7월17일 헌법이 제정되었을때, 그 헌법을 논의한 20일간의 기록을 재정리하고 의미를 분석한 책입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최초의 총선을 치릅니다. 3월1일 유엔 소총회에서 총선일을 5월 9일로 결정합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뉴욕타임즈는 3월 1일 총선일을 결정하고 발표한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미 세계적으로도 한국역사에서 3월 1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군정청은 다시 이를 수정하여 5월 10일로 총선일을 바꾸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5월 9일이 일요일인데다가 개기일식이 있어서 바꾸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책에는 정부수립시기의 헌법 제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아무튼 5월 10일 총선결과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들이 뽑히게 됩니다. 5월 31일 국회 개원이 있었고 국회의장에 선출된 이승만 의장이 3.1혁명이 있었던 1919년 기미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아 ‘대한민국 30년 3월1일’이라는 연호도 내겁니다. 당시 198명의 제헌의원 중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만든 두개의 정당 18명의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역사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설계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개원식이 끝나고 6월 3일부터 6월 22일까지 20일간 국회는 매일 회의를 열어 헌법을 논의합니다. 솔직히 저자의 말처럼 저도 남한에서만 치뤄진 선거에서 뽑힌 제헌의원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무엇을 알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졸속이고 짜깁기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진지하고 활기에 넘치는 논의를 보면서 지금 국회가 이 정도라도 될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오류도 많았지만 토론과 변화가 있는 정치의 향연이 있는 드라마였고 역사였습니다. 그 결정으로 오늘의 우리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부터 국민일지 인민일지 하는 개념부터, 남녀평등, 친일파 청산,인권, 종교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있었습니다. 헌법의 순간은 결정의 순간이었습니다.
결정의 중요성
결정의 순간 결정된 내용이 우리를 규정해 왔습니다. 설계도에 의한 정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라살림연구소장인 저로서는 그중에서 무상교육에 대한 내용이 다가왔습니다.
제헌헌법 제16조는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으로 무상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교육기본법 제8조는 의무교육은 6년의 초등교육과 3년의 중등교육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무교육은 강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따라서 강제하려면 무상교육이어야합니다. 그런데 이 의무교육의 기간과 무상교육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기회의 균등이었습니다. 이미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의무교육을 천명했고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도 ‘12세까지의 초등기본교육과 12세이상의 고등 기본교육에 관한 일체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의무로 시행함’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내용보다 후퇴한 헌법안 16조는 당연히 격렬한 논란을 불러옵니다. 의무교육 기간에 대해서도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 전문위원은 현실론을 이야기합니다. 형편이 어려우니 우선 초등학교라도 하자는 것입니다. 무상교육 범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업료 이외의 후원회비도 무상에 포함되느냐는 논란입니다. 초안 작성측에서는 수업료 면제만이라고 답합니다. 학용품비나 후원회비는 부모들의 부담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된데에는 원칙보다 현실론이 작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의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나라가 15세나 18세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죠. 우리 헌법을 만들때 참고 한 독일 바이마르 헌법도 이미 당시보다 40여년전에 18세까지 의무교육에 수업료 일체와 학용품비까지 제공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론에 밀려 법은 통과됩니다. 다만 “적어도’라는 석자를 넣게 됩니다. 현실론에 굴복하지만 여지를 만들어둔 것입니다. 당시 조봉암 의원은 기록에 남기기 위하여 ‘무상이란 의무교육을 국가가 완전히 책임진다는 의미라는 점과 경제상황이 호전된다면 의무교육을 전면무상으로 실시하자는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자고 합니다. 지금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론에 굴복한 결과 초등학교 학교운영 지원비는 1997년에야 없어집니다. 2002년에 중학교 과정도 의무교육에 포함되지만 2012년에야 학교운영지원금이 헌재 판결로 사라집니다. 고등학교 무상교육은 2021년에야 실시됩니다. 수십 달러 빈곤국일때 현실론에 굴복한 결과 3만달러 시대에야 겨우 실시된 것입니다.
결정의 순간 결정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사례입니다.
2025년 예산 결정의 순간
제헌의회 같이 한번의 결정도 중요합니다. 그때 결정은 어떤 원칙과 목표냐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조금 길이 어긋나더라도 그 방향으로 가려는 노력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원칙과 방향이 없거나 무시되면 엉뚱하게 가게되고 위험한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원칙이라면 정부기능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더 많은 일을 하겠다면서 감세를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막대한 부채만 늘게 됩니다. 여유 재원을 허는 것도 언제까지 계속할수는 없습니다.
이번 예산안의 구체안이 나오게 되면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늘리는지 알게 됩니다. 예산은 진심을 말해줍니다. 분명한 것은 원칙과 목표없이 즉흥적으로 결정한 사안은 오랜시간도 아닌 당장의 피해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 분석에 의하면 연구개발 예산 4조원 삭감으로 생산이 9조원 줄었다고 합니다. 주택 공급대책을 세운다면서 집값 부양이라는 단기대책만 세운 결과 LH의 부채가 62조원 늘거라고 합니다. 막연한 의료공백을 메꾸려고 건보재정에서 지급한 돈이 이미 1조 1783억원이라고 합니다.
케인즈가 이야기한 ‘장기적으로 우린 모두 죽는다’라는 말은 장기적인 효과만을 기대하고 단기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장기적인 원칙과 목표가 없이 단기적인 대응만 하게 될 경우는 더욱 참혹한 결과만을 가져올것입니다.
다시 헌법의 순간 한 결정을 돌아봅니다. 원칙과 목표에 대한 결정이 중요합니다. 물론 각론도 중요합니다. 문제는 원칙과 목표라는 방향도 없는 디테일은 더 최악이라는 것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 70년전 약속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의무교육을 확대하고 완전히 무상으로 하자’던 다짐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수백배 잘살게된 지금도 교육 균등을 말하던 조소앙의 외침은 아직도 먼나라 이야기입니다.
"아이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우유 한 병씩 먹고 집한채씩 가지고 살게하오리다" <저작권자 ⓒ 사회적경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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