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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이든 기준을 만든다. 관습, 법, 문화, 도덕.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선을 긋고 이름을 붙인다. 문제는 그 기준이 설명을 넘어 권력이 되는 순간이다. 기준은 누군가를 조정 대상, 관리 대상으로 만든다.
과학도 기준을 다룬다. 그러나 과학은 권력이 임의로 정하는 규범이 아니다. 과학은 가설을 공개하고, 데이터를 열어두고, 누구든 검증할 수 있게 만드는 절차다. 같은 조건이면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 틀리면 고친다. 과학의 힘은 권위가 아니라 재현 가능성에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기본을 흔드는 장면을 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기구 탈퇴를 선언하며 기후 의제를 ‘이념’으로 분류했다. IEA에는 탄소중립 목표를 폐기하지 않으면 탈퇴하겠다고 압박했다. 탄소중립은 “파괴적인 환상”이고, 유럽은 정치적 욕망 때문에 이를 고집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런 말도 나온다. “이산화탄소는 본질적으로 해로운 물질이 아니다. 사람이 숨 쉬면 나오고, 나무는 그것으로 자란다.” 맞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사실에서 곧바로 “그러니 위험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점프하는 순간, 과학은 사라진다. 과학은 존재 여부를 따지는 학문이 아니라 농도와 속도를 따지는 체계다. 산업혁명 이전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약 280ppm이었다. 지금은 420ppm을 넘었다. 배출이 흡수보다 많으면 농도는 올라간다. 농도가 오르면 열이 더 갇힌다. 이것이 온실효과다. 이 인과는 정치가 아니라 물리다.
그래서 온도를 안정시키려면 순배출을 0에 가깝게 만들어 더 이상 농도가 상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넷제로의 최소한의 물리적 의미다. 연도와 경로는 토론할 수 있다. 그러나 원리 자체를 “환상”이라 부정하는 것은 과학적 논쟁이 아니다. 기준을 버리면 공백이 생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누군가가 차지한다. 미국이 한 발 물러서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기후를 전제로 산업 전략을 설계하고 있다. 기후는 더 이상 캠페인의 언어가 아니다. 산업의 설계 조건이다.
탄소 회계 방식, 제품당 배출량 기준, 공급망 추적 시스템, 에너지 효율 규격. 이런 표준이 다음 시장을 만든다. 기준을 설계하는 쪽이 기술을 선도하고, 기술을 선도하는 쪽이 자본을 끌어당긴다. 나는 2월이 절망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은 누가 과학을 존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과학을 대체하려 하느냐의 문제다.
과학이 불편하다고 해서 지울 수는 없다. 국제기구에서 탈퇴할 수는 있어도, 물리 법칙에서 탈퇴할 수는 없다. 이산화탄소가 호흡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농도가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는지는 계산의 문제다. 과학은 우리에게 편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검증 가능한 답을 준다.
기준을 버릴 것인가, 설계할 것인가. 지금의 선택이 다음 산업 질서를 결정한다.
칼럼 「결국 우리가」를 기고하는 김항석 대표는 탄소감축 전문기업 서튼지티에스(CERTAIN GTS)와 케이씨시티에스(KCCTS)를 설립·운영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 메콩델타 지역의 맹그로브 수목 사업, 인도 웨스트벵갈의 바이오차 사업, 아프리카 가나의 에너지 효율화 사업 등을 추진하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환경 보호와 적응·완화 분야에서 다양한 국제 프로젝트와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저작권자 ⓒ 사회적경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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